가루비 변신의 1년…경영권 지키기보다 회사 성장이 먼저

2010. 8. 27. 15:53

일본의 제과업체인 가루비(Cal bee). 한국에서는 새우깡의 원조 제품인 ‘갓파에비센(かっぱえびせん)’을 만든 회사로 알려졌다.

일반 제과시장의 40%를 차지한 이 회사는 지난해 7월 의외의 발표로 업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펩시콜라에 지분의 20%를 매각했기 때문이다.

가루비의 매출 중에서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3% 수준이다. 사실상 국외 매출이 없다고 해도 괜찮은 매출을 보이는 내수전문기업이다. 이런 회사가 다국적 회사에 지분을 매각했다는 사실 자체가 업계 관계자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가루비가 전통적으로 가족경영을 지속해온 기업이란 점도 업계의 충격을 더하는 데 한몫했다.

가루비의 전직 사장을 지낸 다나카 야스오 씨는 “펩시콜라와 교류는 10년 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지분 제휴는 19.9%가 한계일 것으로 여겼다”고 털어놓았다. 20%를 넘으면 펩시콜라에 흡수될 것이란 우려에 저항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회사의 오너로 군림해온 마쓰오 가문의 반대가 심했다.

두 회사의 규모만 봐도 납득이 가능한 얘기다. 2009회계연도 가루비의 매출은 1464억5200만엔(약 2조원)이었다. 이에 비해 펩시콜라의 지난해 매출은 432억3200만달러(약 51조원)에 달한다. 무려 25배의 차이가 나는 회사니 불안감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염려에도 불구하고 20% 지분 매각이 이뤄진 것은 그만큼 가루비의 사정이 급했기 때문이었다. 당장 자금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가루비 입장에서는 향후 성장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국외시장 공략을 위해 펩시콜라가 필요했던 것. 매각 지분이 20%까지 늘어난 것은 펩시콜라 측의 적극적인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다.

한국과 같이 일본에서도 지분율이 20%를 넘어야만 지분법 평가대상이 된다. 즉 가루비의 실적이 펩시콜라의 실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마지노선이 20%라는 얘기다.

또 펩시콜라의 국외 농장 등을 통해 향후 생산에 필요한 재료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것도 가루비 입장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펩시콜라 입장에서는 시장점유율 2.6%에 불과한 일본 내 제과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가루비를 택했다.

양사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지며 전격적으로 성사된 20% 지분 출자 후 1년이 지난 지금 가루비에서는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가루비 경영의 큰 틀인 ‘오너 경영’이 사라진 것이다. 당장 외부에서 경영진을 영입했다. 기존의 경영 방식을 생각한다면 파격에 가까운 일이다. 회사 측의 새로운 경영진이 내건 모토는 ‘전 직원 경영’이다.

직원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사고하고 움직이자는 의미다. 모토가 바뀌었다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현장에선 이미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관련 업계의 반응이다.

예를 들어보자. 가루비는 지금까지 업계의 저가판매 경쟁과는 선을 그어왔다. 당장 제품에 대한 자신이 있으니 가격인하는 하지 않겠다는 것. 그러나 지금은 더 적극적으로 나서 가격인하를 주도하고 있다.

마쓰모토 아키라 회장은 “좋은 제품의 체면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회사의 수익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공언할 정도다. 그는 현재 6.5%에 머물러 있는 매출영업이익비율을 4년 후까지 10% 이상으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비용절감을 위해 기존 가루비 영업의 특징도 다 바꾸고 있다. 일례로 지금까지 판매장을 돌며 감자칩의 신선도를 확인해오던 ‘신선도 확인반’도 줄였다. 궁극의 집요함으로 요약되는 일본 기업 특유의 철저함을 버린 것이다.

잡지는 가루비가 새로운 변화를 통해 성과를 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일본 기업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확인시키고 싶어 하는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닛케이비즈니스의 기대가 현실로 나타날 수 있을지는 앞으로도 몇 년을 더 지켜봐야 한다.

다만 그동안 절대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지분 매각까지 나서며 일본 기업들이 변화하려 한다는 점은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도 주목할 대목이다.

Nikkei Businessⓒ 7월 26일자 기사 전재

[정욱 매일경제 경제부 기자 woo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568호(10.08.1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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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Practice‥`감자칩` 히트 제조기 日가루비…원료감자 재배 방식까지 바꿔

2010. 8. 27. 15:49


농심 '새우깡'의 원조가 일본 제과업체 가루비(Calbee)의 '갓빠에비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루비는 1964년 새우가 첨가된 갓빠에비센을 개발했고, 농심은 이를 참고해 1971년 새우깡을 내놓았다. 새우깡이 한국에서 국민과자로까지 불리듯이 갓빠에비센은 일본에서 장수 히트상품의 명성을 지금도 유지한다.

가루비는 일본 제과시장에서 히트제조기로 유명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감자칩이다. 가루비의 감자칩 생산량은 1일 208만봉지로 연간 매출액 540억엔(약 7500억원)에 달한다. 경쟁업체인 메이지제과(80억엔) 제품의 약 7배다. '포테이토 칩'이란 상표를 사용하는 가루비의 감자칩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낵이다.

뿐만 아니다. 스틱 형태의 감자칩인 '자가리코'와 '자가비'는 각각 연간 매출 250억엔과 56억엔(2009년 기준)을 자랑한다. 일본 제과시장에선 연간 20억엔어치만 팔려도 히트상품이다. 일본 제과시장 점유율 40%로,메이지제과(50%)에 이어 2위인 가루비가 히트상품을 줄줄이 내놓는 비결은 무엇일까. 한번 내놓은 상품은 팔릴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개선의 개선을 거듭하는 소위 '근성 경영'이란 분석이다.

◆안 팔린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가루비 스낵의 잇딴 히트 비결에 대해 마쓰모토 아키라 회장은 최근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기본에 충실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철저히 시장조사를 하고, 신상품 아이디어를 짜내서 제품을 개발하는 프로세스는 다른 회사와 다를 게 없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건 이런 기본 작업에 집념을 쏟았다는 점이다.

특히 한번 내놓은 상품은 팔릴 때까지 개선에 개선을 거듭한다는 게 가루비의 원칙이다. 대표적 사례가 '자가리코'.가루비가 이 제품을 처음 시판한 건 1994년.당시 이름은 '자가스틱'이었다. 스틱형 감자(일본말로 '자가') 스낵이란 뜻에서다. 개발기간만 3년 이상 걸린 야심작이었다. 그러나 자가스틱은 처음에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이 때부터 가루비의 근성이 발휘됐다. 가루비는 왜 안 팔리는지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결론은 포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났다. 상자형 종이포장을 열면 감자 스틱이 반토막 난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개발진은 감자 스틱의 길이를 아예 절반으로 줄이고, 포장도 강도가 높은 종이컵으로 바꿨다. 또 감자스틱이 사각형이어서 입안에 상처가 난다는 소비자 불만에 따라 형태를 원통형으로 개선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히트상품인 자가리코다.

가루비는 신제품을 판매하면 13주일 후에 '13주 리뷰'라는 회의를 연다. 문제점 도출 회의다. 시판 후 3개월이면 소비자 반응은 명확히 드러난다. 그 중에서 불만들만 모아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하는 게 '13주 리뷰'회의다. 이런 회의는 한번에 그치지 않는다. 소비자 불만이 접수될 때마다 상품개발자들이 모여 머리를 맞댄다. 전국 7곳의 고객상담실에 상주하는 상담원들은 불만이 접수되면 즉각 고객을 찾아가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모니터링하기도 한다.


◆부스러지지 않는 감자칩?

가루비는 2008년 '부스러지지 않는 감자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소비자 모니터링 결과 감자칩의 불만 중 하나는 포장을 뜯었을 때 적지 않은 감자칩이 부스러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걸 개선할 방법은 없을까'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게 '부스러지지 않는 감자칩'프로젝트다. 연구 끝에 가루비는 두 가지 개선점을 찾아 냈다. 첫째,공장 내 생산과정에서 감자칩이 부서지는 것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둘째,원료인 감자의 크기를 균일하게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자의 크기가 클수록 감자칩이 부스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가루비는 생산공정을 개선했다. 감자를 썰고 튀기는 가공과정 중 감자칩이 기계에서 떨어지는 낙폭을 최소화했다. 다음엔 균일한 크기의 감자를 공급받기 위해 감자 재배농가를 설득했다. 감자를 심을 때 간격을 균일하게 하고, 수확할 때 감자에 상처를 주지 않는 방법까지 개발해 지도했다.

마침내 '부스러지지 않는 감자칩'프로젝트는 성공했다. 개선 결과 봉지당 부스러진 감자칩의 수를 종전의 절반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원료인 감자 하나하나, 감자칩 한 개 한 개에도 정성을 다하는 가루비식 근성 경영의 결실이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가루비가 원료인 감자 재배방식까지 개선했다는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건 가루비가 원료로 쓰이는 감자 전량(연간 22만t)을 계약재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루비는 일본 제과업체 중 유일하게 감자칩 전용 감자를 계약 재배한다. 홋카이도 등 전국의 감자 계약재배 면적은 6700㏊로 도쿄시보다 넓다. 재고관리 등 취급이 어려워 다른 제과업체는 꿈도 못 꾸는 감자 계약재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회사가 주도적으로 제품개선을 하려면 원재료부터 최종 생산까지 직접 관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루비 관계자)

◆'감자칩은 신선식품이다'

감자칩의 '신선도'를 추구하는 것도 가루비만의 특징이다. 가공식품인 감자칩에 신선도가 왜 중요할까. 가루비는 감자칩도 신선식품이란 생각이다. 신선도에 따라 맛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신선도가 높을수록 칩 표면의 기름이 산화하지 않아 본래의 고소한 맛이 유지된다. 이를 위해 가루비는 제조일로부터 45일이 지난 상품은 팔지 않는다는 내부 원칙을 갖고 있다.

감자칩의 유통기한은 제조 후 4개월이다. 하지만 한 달 반이 지난 제품은 판매점에서 직접 회수한다. 이를 위해 200여명의 계약직 주부사원을 고용,전국 소매점에서 팔리는 가루비 감자칩의 제조일자를 조사하고 있다. 45일이 지난 감자칩이 진열된 것이 확인되면 즉각 제품을 회수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조금이라도 신선하고 맛있는 감자칩을 고객들이 맛보게 하고 싶다"는 집념도 근성 경영의 한 단면이다.

도쿄=차병석 특파원 chabs@hankyung.com

Pencils Pencils 사회

'금리인상' 서두를 필요 없다.

2010. 8. 26. 23:52

잠재GDP 수준은 현재의 경기를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이지만 잠재GDP 수준을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생산함수 접근법에 의할 경우 아직까지 디플레갭이 큰 것으로 나타난다. 물가지표나 고용상황을 보아도 물가상승압력이 큰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금리 인상은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비자물가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다. 이는 물가지표가 가계의 구매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최근과 같이 경기의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는 경기상황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경기의 상승국면은 회복국면과 확장국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회복기는 상승속도가 빨라지는 경기 가속의 시기이고, 확장기는 상승속도가 둔화되는 시기이다. 경기가 확장국면에 들어서면 수요 증가에 부응해 자본, 노동 등 생산요소의 투입을 늘려야 하는데 이들 요소의 공급이 제한되다 보니 인플레이션 압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 경우 경기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금리 인상 등 긴축정책이 필요하게 된다. 
 
물가상승압력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수요 크기를 나타내는 실제GDP와 공급능력을 나타내는 잠재GDP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최근의 빠른 성장으로 일각에서는 하반기 중 수요가 공급능력을 넘어설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이로 인해 정책금리의 추가 인상시기, 즉 금리의 인상속도에 대한 논의도 증폭되고 있다. 잠재GDP의 측정에 있어 대표적인 추정방법들을 이용하여 향후 우리경제의 총수요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 보고, 인플레갭 발생시기를 판단해 보고자 한다. 
 
위기시 잠재GDP 추정 불확실성 커 
 
추정방법의 장단점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잠재GDP가 가지는 특성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잠재GDP란 한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를 이용해 공급가능한 최대생산수준으로 정의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통상 인플레이션 압력을 유발하지 않는 생산수준을 의미한다. 실제GDP가 잠재GDP를 상회한다는 것은 수요가 경제의 공급능력을 초과하고 있음을 의미하게 되며, 이는 가격 상승을 유발하게 될 것이다. 인플레이션 압력을 유발하는 초과수요는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실질GDP의 증가율을 둔화시킬 것이며, 반대의 경우에는 늘어나는 수요만큼 생산을 늘릴 수 있어 실질GDP의 상승을 가져오게 된다. 그러므로 잠재GDP는 실제GDP의 장기적인 추세로 간주할 수 있다. 
 
경제의 구조변화나 기술발전으로 인하여 장기추세가 변동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특히 경제위기와 같은 큰 충격이 올 경우 경제전반의 구조변화로 잠재성장률이 둔화될 수 있는 것이다. 잠재GDP의 추정에 있어 장기추세의 변화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하다. 경제가 급락한 후 회복되는 시기에 만약 과거추세가 지속될 것으로 가정하게 된다면 디플레이션갭(= 실제GDP < 잠재GDP, 이하 디플레갭)이 과도하게 반영되게 된다. 이 경우 금리 인상시기를 놓쳐 인플레이션이 가속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반대로 일시적 충격을 장기추세의 변화로 고려하게 된다면, 실물경기가 충분히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인플레갭이 생긴다고 오인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 이후 회복기에 잠재GDP를 추정하는 것은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현재의 잠재GDP를 추정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정보는 현재까지 발표된 통계에 한정되어 있는 데 비하여, 경제의 구조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구조변화 이후를 포함하는 장기 정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잠재GDP 추정에 있어 대표적인 방법인 HP필터법, 구조벡터자기회귀모형(SVAR), 생산함수 접근법을 이용하여 잠재GDP를 추정하여 보았다. 잠재GDP 추정에 있어서의 이러한 한계점을 염두에 두고 모형에서 추정하는 잠재GDP 수준을 해석하여 보자. 
 
HP필터법에 의하면 올 1분기 인플레갭 발생 
 
HP필터법은 추세의 변동폭을 일정 수준 이하로 제한하면서 순환변동의 진폭을 최소화하는 값을 잠재GDP로 추정하는 방식이다. 이는 추세의 움직임이 부드러운 형태를 지닐 것이라는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기계적으로 추출하는 방법이어서 추정이 매우 간편하다는 장점을 지닌다. 다만,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아 이론적 기반이 취약하며, 평활화계수(λ)에 대한 선택이 자의적이라는 점 등 단점을 지닌다.  
 
HP필터법으로 올 2분기까지의 GDP자료를 이용하여 잠재GDP를 추정하여 보면, 올 1분기에 벌써 인플레갭이 발생하고 있다(<그림 1> 참조). 최근 빠른 경기회복세가 나타나기는 하였지만,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지난해 0.2%의 매우 낮은 성장률을 기록한 후 회복되고 있는 상황에서 벌써 인플레갭이 발생한다는 것은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이러한 결과가 나타나는 원인은 HP필터법에 의해 추정된 잠재성장률이 과도하게 낮아지기 때문이다. 
 
HP필터는 최근 성장에 대한 정보가 높은 가중치로 주어지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성장이 급락할 경우 잠재GDP의 추세가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후 회복되는 시점에서 높아진 GDP 정보가 추가될 때 기존의 추정된 잠재GDP가 상향 조정되는 특성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외환위기 당시의 GDP자료를 이용하여 HP필터를 적용하여 보아도 확인할 수 있다(<그림 2> 참조). 외환위기 이후 회복기였던 1999년 시점으로 돌아가서 그때 당시 가용한 자료만을 이용하여 HP필터를 적용하여 보았다. 1999년 2분기까지의 정보만을 이용할 경우 이미 인플레갭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가용해진 GDP 자료를 추가할 경우 인플레갭 발생시점이 늦추어지게 된다. 현재까지의 자료를 이용하여 HP필터에 의한 산출갭을 구하여 보면 인플레갭이 나타나는 시점은 1999년 4분기 이후로 나타난다.  
  
HP필터법으로는 미국, 유럽도 인플레갭 발생 
 
또한 HP필터에 의한 추정은 경제위기와 같은 급격한 변화시기 중 산출갭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외환위기 시기와 같이 GDP가 움푹 들어가는 모습을 보일 경우 잠재GDP는 실제GDP의 평균값을 지나가기 때문에 위기 직전에 인플레 갭이 높게 추정되며, 위기 이후에도 인플레갭이 과대평가되게 된다. HP필터에 의하면 1999년 4분기 이후 수요압력이 플러스로 나타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2000년대 이후에도 소비자물가는 상당기간 안정세를 유지했다. 2000~2002년 중의 소비자물가는 연평균 3.0% 증가율을 보였다. 외환위기 이전 90년대(1990~1996년) 소비자물가가 연평균 6.0%씩 상승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원화절상 효과 등을 감안하더라도 수요압력에 의한 물가상승압력이 컸다고 보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HP필터를 이용해 미국의 산출갭을 추정하여 보면, 미국도 올 2분기에 인플레갭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난다(<그림 3> 참조). 이는 IMF나 美의회예산국(CBO) 등에서 현재 미국의 GDP가 여전히 추세 밑에 있다고 보는 시각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결과이다. IMF는 올 해 미국의 산출갭은 -4.3%p로 디플레갭이 지속되고, 2015년까지 이 갭이 플러스(+)로 전환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유로존 역시 HP필터는 올해 0.1%p의 인플레갭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C)는 올 해 -3.6%p의 디플레갭을 보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구조적 시계열 접근법은 지난해 인플레갭 발생 
 
HP필터는 이론적인 접근법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구조적 시계열 접근법을 그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구조적 시계열 분석 접근법 중 구조 벡터자기회귀 모형(이하 SVAR)을 이용하여 추세를 추정하여 보았다. SVAR모형은 자기변수의 과거 값으로 회귀모형을 구성한 후, 교란항에 경제이론에 입각한 제약을 부과하여 추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실질GDP와 소비자물가지수로 구성된 2변수 모형을 고려한다면, 물가가 장기적으로는 GDP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이론적인 제약을 부과하여 구조방정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때 추정계수와 GDP 방정식의 구조적 교란항을 이용하여 잠재GDP를 추계할 수 있다. 
 
SVAR 모형에 의하면 잠재GDP가 시차를 두고 크게 하락하여 작년에 이미 인플레갭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그림 4> 참조). 그렇지만 이러한 결과 역시 HP필터법과 마찬가지로 주의깊은 해석이 요구되는 결과이다. 이번 침체기의 경우 우리나라의 공급측 충격이었다기 보다는 해외수요의 급감과 같은 수요충격이었던 측면이 크다. 그렇지만 SVAR에 의해 추정된 결과는 이번 침체기 동안 GDP의 변동은 대부분 공급충격에 의한 잠재GDP의 변화에 기인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SVAR모형 역시 최근의 급락한 GDP 정보가 잠재GDP의 추정에 민감하게 반영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조적 시계열 분석방법은 잠재GDP의 급격한 하락, 또는 추세의 평행이동을 과도하게 반영하게 되어 침체 후 회복기의 산출갭 추정에는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생산함수 접근법으로는 디플레갭 여전히 존재 
 
시계열 분석 방법의 한계로 인하여 침체기 이후 회복기의 잠재GDP 추정에는 생산함수 접근법이 유용할 수 있다. 생산함수 접근법은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들과 실제산출량간의 함수를 구성하여 추정한 후, 추세에 대응하는 생산요소를 대입하여 잠재GDP를 산출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방법이지만 선진국이나 국제기구들이 잠재GDP를 추정하는데 있어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이용된다. HP필터와 달리 경제이론에 기초하여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변동 요인에 대하여 경제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생산함수 접근법에 의해 잠재GDP를 추정하여 보면 앞의 시계열 분석 접근법과는 상반되는 결과가 도출된다(<그림 5> 참조). 즉 최근의 빠른 경기회복에도 불구하고 실제GDP는 여전히 잠재GDP를 하회하여 디플레갭이 남아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위기 이전에도 산출갭은 HP필터와 달리 인플레갭이 분기기준 1%p를 넘지 않았으며, 2009년 1분기 -6%p까지 낮아졌던 산출갭은 이후 빠른 경기회복으로 크게 줄어들었으나 올 2분기에도 여전히 -1.4%p의 산출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투자가 감소하더라도 자본의 증가율이 크게 떨어지지 않으며, 노동투입의 감소 역시 일시적인 측면이 커 잠재적인 고용률은 완만한 하락에 그쳐 잠재GDP의 증가율을 크게 둔화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생산함수 접근법은 생산요소의 잠재적인 수준에 대한 가정에 따라 추정결과가 바뀔 수 있다는 단점을 가진다. 예를 들어 자연실업률의 상승 여부나 요소생산성 증가율의 추세에 대한 판단에 따라 추정된 산출갭의 크기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고용지표는 아직 과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해 
 
급격한 경제변동기의 잠재GDP 추정은 추정방법에 따라 결과가 상반되게 나타나는 등 적정 수준을 가늠하기에는 불확실성이 크다. 또한 각각의 한계점이 분명하여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기초지표들의 움직임을 통해 보완할 필요가 있다. 실물경기가 과열 상태인지에 대한 판단은 물가지표와 함께 가동률과 같은 자본의 수급 상황이나 실업률, 고용률 등의 고용상황을 통해 수요압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용 지표의 경우 위기 이후 아직 과거 수준을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실업률은 3.5%로 낮아져 있는 상황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실업률이 고용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참고지표로의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된다. 경기침체기에 실업률이 상승하기보다는 구직 자체를 포기하여 경제활동참가율이 낮아지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용상황을 보기 위해서는 실업률보다는 고용률이나 경제활동참가율을 보아야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경제활동참가율은 평균 62%에 가까운 수치를 보이다가, 위기 이후 낮아진 상태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경제활동참가율은 아직까지도 61% 수준에 머물고 있어 위기이전에 비해 약 1%p 낮아져 있는 상황이다(<그림 6> 참조). 고용률(= 생산가능인구 대비 취업자수) 역시 최근 취업자수가 빠르게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으나, 2000년대 평균에 비해서는 여전히 0.5%p 가량 낮은 상황이다. 이는 취업자수가 정상상태에 비해 약 25만명 정도 작은 상황을 의미한다. 
 
가동률의 경우에는 과거 평균을 웃도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제조업 평균가동률은 2000년대 평균 78.6%를 기록했는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62.8%까지 급감하였다. 그러나 최근 빠른 회복에 힘입어 올 6월에는 83.9%까지 올라가 있는 상황이다(<그림 7> 참조). 이를 통해 자본에 대한 수요가 공급에 비해 높은 상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경기전망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져 있는 상황이기에 기업들이 신규설비를 크게 늘리지 않으면서 기존설비의 활용을 증가시킨 점이 가동률 상승의 주된 원인으로 보인다. 즉 신규설비의 공급이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불확실성으로 이에 대한 수요가 줄어든 점이 가동률 상승의 주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자본의 경우 노동과 달리 수입에 의해 공급을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보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자본의 수급상황보다는 고용지표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물가지표도 안정세 지속 
 
소비자물가도 아직까지 안정세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7월 소비자물가는 전년동월대비 2.6% 상승에 그쳐 6개월 동안 2%대의 물가상승률을 보이고 있다(<그림 8> 참조). 농축수산물의 가격이 다른 품목에 비해 크게 올라 전년동월대비 7.5% 상승하여 우려되는 대목이긴 하나, 식품가격에 비해 공산품 가격은 2.8% 상승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서비스 가격은 1.7% 상승에 그쳐 전체 물가는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물가지표에서 수요압력을 보기 위해서는 통상 단기적인 수급 차이로 변동이 심한 농축수산물과 석유류의 가격을 배제한 근원물가지수를 참조하게 된다. 근원물가지수도 7월달 1.7% 상승하는 등 6개월 동안 안정적인 모습을 지속하고 있어 수요압력이 크지 않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하반기에는 공공요금 인상이 예정되어 있다. 또한 최근 이상기후로 인하여 밀가격을 중심으로 국제농산물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이로 인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상반기에 비해서는 증가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지만 이는 비용측 요인에 의한 물가상승 요인이지 수요압력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비용측면의 물가상승 압력은 원화강세 로 상당부분 상쇄될 수 있을 것이다. 경상수지의 흑자기조 지속과 외국인투자자금의 순유입으로 원화가 강세를 보이면서 수입물가를 안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금리 인상 속도, 신중한 접근 필요 
 
더욱이 하반기에는 실물경기의 상승세가 상반기보다 낮아질 전망이다. 그 동안 원화약세를 통한 수출회복과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지출로 인하여 빠른 반등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반기에는 원화약세 효과나 정부의 정책효과가 축소될 전망이다. 또한 선진국의 성장세 둔화로 우리 주력제품들의 수요증가 추세 역시 꺾일 것으로 예상되어 수출의 활력 역시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만약 지금과 같은 빠른 증가세가 계속 유지될 수 있다면 인플레갭, 즉 수요압력에 의해 물가상승률이 높아질 가능성이 커지겠지만, 하반기 성장세 둔화가 예상된다는 점에서도 수요압력이 커질 가능성은 낮을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 주장하듯이 올 하반기에 인플레갭이 나타난다면 이는 금리 인상 속도를 빨리 가져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반기 인플레 갭이 발생하기 전에는 적정금리 수준으로 금리를 인상시킬 필요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올 하반기에 인플레갭, 즉 수요측 요인에 의한 물가상승압력이 발생한다는 증거는 뚜렷하지 않은 상황이다. 향후 경기상승세가 둔화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 중에도 디플레갭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빠른 회복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물가상승압력이 낮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경기 회복 추세가 지속되면서 금리를 적정금리 수준으로 맞추어 갈 필요가 있지만 금리인상의 속도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급격한 경제변동 시기에는 불확실한 인플레갭 추정치보다는 고용률, 물가 등 실물경제의 수급 상황을 나타내는 지표들에 보다 집중할 필요가 있다.  <끝> 

2010.08.16 LG경제연구원 강중구

 

Pencils Pencils 사회

엔씨소프트 윤송이의 반란

2010. 8. 26. 23:05

엔씨소프트 부회장 '윤송이'씨.

그는 천재소녀로 불렸다.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했고, KAIST를 수석으로 나왔다. 짧게는 6년, 길게는 8년 걸린다는 MIT 미디어랩을 3년6개월 만에 끝냈다.

그의 나이 24세, 최연소 여성 박사였다. 28세가 되던 2004년 3월엔 SK텔레콤 임원에 올랐다. 이 역시 최연소 기록. 단기속성의 달인 같다. 국내에서만 각광 받았던 건 아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를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2004)’으로 꼽았다. 2006년엔 WEF(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됐다. 이 대단한 이력의 주인공은? 윤송이(35) 엔씨소프트 부사장이다.

그는 화양연화(花樣年華·꽃처럼 아름다운 때)를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보냈다. 스스로 원했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그를 양지로 끌어냈다. 정치권도 ‘금배지’를 달아주겠다며 연일 손짓했다. 그의 앞길엔 장애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냉정한 법. 한번 띄웠다 싶으면 보란 듯이 내친다. 윤 부사장도 그걸 피하지 못했던 것 같다. SK텔레콤 시절 그가 추진한 프로젝트(1㎜)가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세상은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천재소녀의 명성에 흠집만 낸 프로젝트’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리 원하지도 않았는데 붙여진 별명이 되레 부메랑처럼 그의 가슴을 쳤을지 모른다.

2007년 말, 그는 SK텔레콤에 사표를 던졌다. 32번째 생일을 꼭 일주일 앞둔 때였다. 스포트라이트는 꺼졌고, ‘왜 떠날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납득하기 힘든 소문도 돌았다. 그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언론과의 접촉도 끊겼다. 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건 사표를 낸 지 1년 여가 흐른 2008년 11월. 남편(김택진)이 이끄는 엔씨소프트 부사장에 취임한 직후였다. 물론 취임 소식이 전부였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엔씨소프트도 ‘윤 부사장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방침이 그렇다고 했다.

올 7월 둘째 아들 출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2년여. 천재소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윤 부사장을 8월 9일 롯데호텔월드강남에서 만났다. 갈색 원피스에 굽이 높지 않은 구두. 생머리에 웃는 인상. 머리를 조금 길렀을 뿐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겉보기에 달라진 점은 딱 하나. 치아 교정기를 낀 것뿐이다. “교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라고 묻자 “필요했어요”라며 살포시 웃는다.

윤 부사장을 이제 천재소녀라고 부르기엔 어색하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 두 아들의 엄마다. 첫째는 언론에 알려졌듯 2008년생이다. 둘째는 올 7월 태어났다. 윤 부사장을 만난 건 그의 출산휴가 때였다. 첫째는 자연분만했는데 둘째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유독 심한 산고 끝에 둘째를 봐서일까. 그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렵게 세상에 나오고 길러졌는지 새삼 절감해요. 사람이 소중하다는 걸 더 느끼게 됐어요.” 두 아이 중 누가 예쁘냐고 물었다. “두 아이 모두 똑같이 예뻐요.” 한때 천재소녀로 불렸던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궁금했는데, 대한민국 엄마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윤 부사장의 이미지는 별명을 분리하면 금세 나온다. 천재 그리고 소녀다. 그를 소개한 글을 읽어보면 늘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천재지만 ‘하하 호호’하면서 웃는 영락없는 소녀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인 것 같다. 별명과 그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윤 부사장은 단 한 번도 소녀 같은 웃음을 짓지 않았다. 질문이 이해되지 않으면 입을 쉬이 열지 않았다. 인터뷰 후 주고받은 e-메일에서도 그랬다.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엔 답을 하지 않거나 주석을 달았다. 이런 식으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답을 하기 어렵고 모호하지만…” “지향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아서 모호한 듯합니다만…” 치밀한 그의 성격이 읽히는 대목이다.

엔씨소프트 취임 전후 실적

“현장에서 발로 뛰고 싶었다”
다음은 천재 이미지. KAIST를 다니면서도 동아리 4곳에서 활동하고, 그림·운동(테니스)·음악에 능숙. 이게 윤 부사장의 이미지다. 그야말로 천재적이다. 정작 윤 부사장은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재소녀란 별명에 대해서도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공부든 운동이든 즐기면서 했다고 말했다. 특별한 걸 배우고 싶어서 KAIST 1학년 때 2학년 전공과목을 들었고, 예술활동을 열심히 할 요량으로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이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고등학생, 대학생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론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변함없는 듯하다. 윤 부사장이 출산한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엔씨소프트 내부 관계자도 “임신 중인 줄 알았는데”라고 했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출산하기 바로 전날에도 그는 회사 자료를 훑어보고 e-메일로 회신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 출산 사실을 모를 수밖에….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윤 부사장은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한다. 천재형이라기보단 노력파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MIT 미디어랩의 박사학위를 땄을 무렵,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특히 연구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대학교수도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새 길을 가고 싶었다. “학교에 있다 보니까 시야가 한군데로 고정되는 것 같았어요. 많은 가설을 현장에서 풀어보고 싶었죠. MIT에서 배운 걸 기업에서 적용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어요.”

그는 2002년 글로벌 컨설팅기관 맥킨지에 들어갔다. 조직생활의 원리와 1차 산업을 배웠다. 2002년 10월 최태원 회장이 출자한 SK그룹의 자회사 와이더댄닷컴 이사에 발탁됐고, 2년 후 SK텔레콤 상무에 올랐다. CI(Communication Intelligence)-TF를 총괄하면서 50여 명을 이끌었다. 그의 야심작 1㎜도 2005년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1㎜는 휴대전화를 음성통화·데이터통신의 도구에서 벗어나 ‘손안의 친구’ ‘손안의 비서’로 발전시키겠다며 선보인 신개념 서비스. 가령 사용자가 휴대전화에 날씨라고 입력하면 가상 캐릭터가 스스로 무선 인터넷에 접속해 날씨를 알려준다. 사용자가 일일이 접속할 필요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같다. 윤 부사장도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앞선 기술이었던 걸까. 성적이 기대치를 밑돌았다. 2년 동안 가입자를 22만 명 모으는 데 그쳤다. 한 달에 1만 명도 가입하지 않은 셈. 1㎜에 대해 윤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건 인정해요. 그렇다고 실패로 보진 않아요. 의미 있게 도전했는데 넘어야 할 허들이 많았어요.”

그가 말하는 허들은 이것이다. 1㎜를 서비스하려면 이 프로그램이 깔린 하드웨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SK텔레콤은 망(網)사업자. 하드웨어를 만들지 못했다. 1㎜의 실패 요인으로 단말기 부족이 꼽힌 이유다. 윤 부사장이 1㎜의 실패를 만회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자 일부 여성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윤송이는 연구소에 있었어야 했다.” 새 길을 찾아 나선 그의 자존심을 짓밟는 이야기. 그도 “신문을 통해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SK텔레콤이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SK텔레콤도 윤 부사장을 영입한 후 많이 변했다. 한 관계자는 “SK텔레콤의 전략을 음성통신에서 무선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윤 부사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엔씨소프트에서 계속된다. 김택진 대표와 결혼한 후 부사장에 취임했지만 그가 엔씨소프트와 인연을 맺은 건 2004년이다. 김 대표가 먼저 ‘사외이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윤 부사장은 왜 이 제안을 선뜻 수용했을까. “엔씨소프트의 해외 지사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창구가 아니었어요. 현지인을 채용하고, 각 나라의 문화에 맞는 제품을 공급했죠. 국내 기업 중 (규모를 막론하고) 가장 글로벌화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다. 엔씨소프트의 글로벌 비즈니스는 유명하다. 2000년 해외 진출에 뛰어든 후 미국과 유럽에 지사를, 일본·중국·대만·태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제품 판매 창구가 아닌 현지화가 이들의 목적이다. 그 결과 엔씨소프트의 국내외 매출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은 36%에 달한다.

윤 부사장의 공식직책은 CSO(최고전략책임자). 회사의 미래 밑그림을 그린다. 김 대표는 윤 부사장이 취임한 후 R&D(연구개발)에 집중한다. 부부 공동경영이 아니라 분리경영에 가깝다. 김 대표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을 것 같다. 그는 전형적인 엔지니어 출신 CEO. 서울대 전자공학과 재학 중 동아리 ‘컴퓨터 연구회’에서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등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공동 개발했다. 한글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메타자’와 ‘베네치아’ 게임도 그의 작품.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김 대표가 그간 고군분투했는데 윤 부사장이 전략을 맡으면서 한결 편해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윤 부사장이 출산 전 역점을 두고 진행한 것은 게임 포털 ‘플레이엔씨’의 정착이었다. 플레이엔씨는 게임 유저가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내에 이런 유형의 게임포털은 없다. 윤 부사장이 신경을 바짝 쓴 것으로 알려진 게임지식백과사전 ‘파워북’도 유저의 호평을 받는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플레이엔씨, 파워북 모두 김 대표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라면서도 “하지만 윤 부사장의 아이디어와 경험 그리고 추진력이 녹아들면서 정착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윤 부사장 취임 후 달라진 건 또 있다. 엔씨소프트의 매출 감소세가 보란 듯이 멎었다. 엔씨소프트는 2006~2007년 간판 게임 브랜드 리니지가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신규사업도 부진했다. 6년간 800억원을 들여 제작한 ‘리처드 게리엇의 타뷸라라사’ 게임도 흥행에 참패했다. 2005년 3388억원이었던 매출은 2007년 3297억원으로 줄었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766억원에서 495억원으로 감소했다. 회사 안팎에선 ‘게임업계 1위 자리를 뺏길 것’ ‘리처드 게리엇 형제가 먹튀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윤 부사장이 전략을 짜기 시작한 2008년 11월 이후 엔씨소프트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가 취임했을 때 선보인 롤 플레잉 게임 ‘아이온’은 그야말로 대박을 냈다. 2009년 12월 110만 장을 돌파했고, 북미 최대 게임축제(PAX)에서 최고 MMO게임상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매출은 2008년 3468억원에서 2009년 6347억원으로 83% 늘었고, 영업이익·당기순이익은 각각 4.8배(2008년 501억원→2009년 2340억원)와 7.4배(2008년 256억→2009년 1883억)가 됐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윤 부사장이 내실을 탄탄하게 만든 게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며 “김 대표도 ‘복덩어리가 들어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출산휴가 중인 윤 부사장은 지금 엔씨소프트의 새 청사진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 재미있다. 이른바 ‘엄마노믹스’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윤 부사장은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이 행복하고 가정이 안정돼야 회사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겠다는 다짐도 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윤송이의 ‘엄마노믹스’. 엔씨소프트의 성장 젖줄이 될지 모른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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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2009. 4. 26. 20:25

뜬금없이 웬 수수께끼 같은 소리인지 의아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왠지 씁쓸함이 남는 60대 노부부의 현실을 풍자한 이야기를 소개한다.

안씨 부부는 평생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했다. 농사일은 고되고 살림은 빠듯했지만 이들은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했다. 학교 다니는 내내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은 믿음직한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바람대로 장남은 서울의 일류 대학에 입학했고, 안씨 부부는 이들의 비싼 등록금을 대기 위해 논밭을 팔아 가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장남은 그 집안의 자랑이자 희망이었기에. 부모의 적극적인 지원에 보답하듯 아들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서울의 어느 대기업에 입사했다.


몇 년 뒤 결혼한 아들은 안씨 부부에게 귀여운 손자 녀석을 안겨 주었다. 아들 내외는 1년에 두 번 명절에나 잠시 얼굴을 비칠 뿐 평소에는 회사일이 바쁘다며 가끔 전화로만 안부를 물을 뿐이었다. 대기업의 과장이니 오죽 바쁘랴.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안씨 부부는 손자를 보고 싶어 직접 서울로 올라왔다. 며칠 쉬면서 오랜만에 손자 얼굴도 실컷 보고 아들 내외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리라는 안씨의 소박한 꿈은 그리 오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아들집에 온 다음날, 아들은 주말에도 골프 접대를 해야 한다며 새벽같이 나가 버렸고, 손자 녀석은 자기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게임에 열중했다. 며느리도 첫날과는 달리 시부모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결국 다음날 새벽 안씨 부부는 아들 내외 모르게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뒤늦게 부모님의 낙향을 알게 된 아들 내외가 발견한 것은 거실에 남겨진 메모지 한 장뿐이었다. ‘3번아, 잘 있어라. 6번은 간다. ‘. 한참을 생각해 봐도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님, 메모지에 남긴 게 무슨 뜻입니까?”

“음. 그거 말이냐…….”

아들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은 안씨는 긴 호흡을 내뱉고는 말을 이었다.

“내가 너희 집에 가서 보니 너희 집에는 중요한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져 있더구나. 1번은 손자 녀석이고, 2번은 네 부인, 3번은 바로 너다. 그리고 너의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 4번, 가정부가 5번, 그 다음 6번이 우리 부부더구나.”

안타깝지만 이것이 바로 우리네 슬픈 현실이다. 예전에는 자식 농사만 잘 지으면 노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자식이 제아무리 효자이고 부모 공양을 잘하고 싶어도 세상 여건이 따라 주지 않는 것이다.


- 대한민국 3040 노후재테크 독하게 하라 중에서...

Pencils Pencils 사회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99 88 234

2009. 4. 26. 20:22

유엔은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7% 이상 되는 사회를 고령화 사회, 14%를 넘는 사회를 고령 사회, 20%가 넘는 사회를 초고령 사회로 규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평균수명은 늘어나고 출산율은 급격히 저하되어 지난 2000년 고령화 사회로 이미 진입했으며, 2018년에는 고령 사회, 2026년에는 초고령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영국의 인구학자 폴 월리스는 고령화 사회가 세계 경제에 미칠 영향을 리히터 규모 9.0의 강진에 비유했고, 코피 아난 전 UN사무총장은 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은 세계 경제의 시한폭탄이라고 경고했다. 세계는 지금 고령화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그 중심에 다름 아는 우리나라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초고령화 시대로 진입하는 데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10년~20년이 빠르게 조사됐기 때문이다.


2006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총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 인구의 비율은 9.5%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장래 인구추계'에 의하면 이는 2018년 14.3%, 2026년 20.8%, 2050년 38.2%로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금의 추세대로 간다면 불과 20여년 뒤인 2026년에는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즉 인구 5명 중 1명이 65세 이상 노인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99 88 234

이 숫자의 이미는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아프다 돌아간다는 뜻이다.

- 대한민국 3040 노후재테크 독하게 하라 중에서...

* 인구 5명 중 1명이 65세 노인이라.. 왠지 섬뜩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문제는 노후 준비에 있습니다. 보통은 55~60세를 정년으로 보고 그 나이가 되면 일자리 구하기가 매우 힘들어 집니다. 청년들이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데 6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 일할 자리가 있겠습니까.

시급한 것은 60세 이상의 고령자들도 "일자리를 찾는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60세 이상의 고령자들도 "일을 해야 먹고 사는" 사회가 된다는 겁니다. 젊어서 죽어라 일만 한 것도 속상한 일인데 늙어서도 편히 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면 자녀 뒷바라지만 해도 벅찬 세상인데 자신의 노후 대책까지 신경써야 하니 지금의 우리 세대가 얼마나 바삐 살아야 하며 그렇게 살고 싶어도 살지 못하는 이들은 얼마나 어이없고 억울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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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등(outdoor lamp)'

2008. 3. 25. 22:29

1. 왜 ‘외등’인가?

KBS가 10년간 추진하는 HD TV문학관 100선 가운데 8편이 2005년에 방송됩니다. 그 가운데 이미 ‘외등’을 포함 4편이 5월 중에 방송되었구요. 이제 4편이 남았습니다. 저는 하반기에 방송할 또 한편을 제작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실 100선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왜 박범신 선생님의 ‘외등’을 선택했느냐 질문이 주위에서 많았습니다. ‘소나기’, ‘역마’와 같은 근대 순수 문예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2000년대 현대문학도 아닌, 어찌 보면 ‘80년대식’의 ‘낡아 보이는’ 대중소설을 왜 문학관으로 하느냐는 의문이 들었나 봅니다.

저는 대학을 85년에 들어갔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80년대 초반에 보냈습니다. 그 때는 감수성이 무척 예민하던 시기라 소설 한편에도 눈물을 떨궈가며 탐독했는데, 당시 중고생 모두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토스토옙스키의 ‘죄와벌’, 지드의 ‘좁은 문‘ 따위의 외국 ’연예류‘ 소설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참고서를 사러 들른 헌책방에서 우연찮게 한국 소설책을 한 권 접했는데, 그 소설이 바로 박범신 선생님 작품이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코끝이 찡했던 장면은 애인이 숨을 거두고 넣어진 관 위로 남자 주인공이 준비했던 하얀 웨딩드레스를 얹어주던 부분이었던 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꼭 박범신 선생님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에, 2005년 ‘HD TV문학관’ 연출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의 작품의 거진 반은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터라, 제가 새로 읽고 만들 작품을 남겨놓지 않으셨더군요. (지금 KBS 주말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정을영PD 선배가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외등’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첫 장면은 서영우의 동생 -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복이 아니라, 재취하여 들어온 여인의 소생- 서재희에게 오빠의 시신을 확인해달라는 경찰의 전화입니다. 서영우는 민혜주가 입원했던 병원의 근처 삼나무 아래서 동사한 채 발견된 거죠.

바로 이 장면이 제 시선을 담박에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일생을 마감 짓는 남자, 서영우.
물론 원작에서는 민혜주가 이미 떠난 빈 병실을 바라보며 죽습니다만, 아무래도 죽어가는 서영우의 눈에는 분명이 허상이나마 민혜주가 보였을 거란 상상을 나름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플래쉬의 필라멘트, 눈에 덮혀가는 영우의 어깨, 이런 이미지들이 가슴속을 덮쳐왔습니다.

‘플래쉬는 그럼 왜 걸어놨냔 말이야?’

‘글쎄요, 누군가 자신을 보기 바랐던게 아닐까요?’ (소설 P15)

이 강렬한 한 장면이 바로 소설 ‘외등’이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의 원형질’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드라마 ‘외등’이 극적으로 화면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장면만 확실히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래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면, 소설의 창의적인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란 믿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은 356페이지에 이르는 장대한 양인데다가 주인공들이 10대에서 50대에 걸치는 기나긴 세월의 사랑이야기인 탓에, 이를 100분 분량의 단편 드라마에 담기 위해서는 극적 변주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민혜주는 일제 태평양 전쟁에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역사의 아픔을 지닌 어머니를 둡니다. ‘정글에서 왜군들의 정액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 그래서 매독이란 성병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광적인 혐오 등 정신적 상처가 깊이 패인 가련한 여인입니다. 물론 소설 속의 민혜주는 일본인의 피를 받지 않았습니다. 민씨라는 뜨내기 사내의 소생이라고만 표현됩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차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서산댁이 일본 사창가를 떠돌다가 민혜주를 얻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방송 분에서는 이 장면과 관련한 부분이 편집되었습니다, 혜주와 서산댁이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 서산댁과 혜주의 대화 장면 등...DVD 본에서는 생략된 15분 가량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민혜주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이며, 불행한 역사의 현화입니다.
일군 위안부란 과거는 불행하고도 굴욕적인 우리의 현대사입니다. 가해자인 일본에서는 부인하고 잘못을 인정치 않고 있지만, 양측의 어떤 입장을 떠나서 그저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더라도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분명한 아픔의 역사입니다.

몇 해 전 일본인 탈렌트 유민(후에키 유코)씨가 일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일본에 나가자,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네가 왜 눈물을 흘리느냐’ 며 유민씨를 공격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저는 혹시 일본인들이 보더라도 그네들 역시 ‘가슴 아프고 반성을 하도록’ 호소하고 설득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서영우가 있습니다. 70, 80년대 좌우익의 이념이 서로 서린 칼날 맞대던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그 낙인을 등에 지고 사는 남자입니다. 원작에서는 아버지의 관성 탓인지 노동운동가로 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드라마에서는 그 낙인에 대한 서영우의 반작용을 다른 각도에서 현실화하고자 했습니다.
‘지울 수 없다면 덧칠이라도 해야겠다는’ 영우의 몸부림과 혜주의 현실도피의 욕망을 맞닿게 하고 싶었고, 어느 누구도 이 둘을 비난할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씬 86 바닷가 어느곳

혜주 영우 넌 어디쯤, 그리고 난 어디쯤 그 낙인이 찍혀 있을까?
영우 그건 우리 눈엔 안 보이는데 있어, 남들에겐 보이지만.

이 낙인이라는 공통점이 이 두 남녀를 묶는 운명적 고리이며, 다른 편에서는 두 남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덫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노상규는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아이콘입니다.
일제 때부터 친일로 기득권을 누리면서 부를 축적한 매판자본의 상징입니다.

‘노상규의 조부가 총독부의 고급 관리로서 일제의 야만적 전쟁수행을 위해 징병을 독려하고 군량을 모을 때, 서산댁은 열 몇살의 나이로 말라리아 들끓는 정글의 움막에서 포악스런 왜군의 정액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노상규의 부친은 파죽지세 재산을 늘렸으며...(소설 P350)

이렇듯 비틀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각 꼭지점 위에 서영우, 민혜주, 노상규가 서 있었던 것이며, 적어도 결국 외적으로는 서영우와 민혜주의 사랑이 노상규에게 투항하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이것이 현실의 비극입니다.

외등은 ‘단순한 사랑 놀음’의 이야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은 운명적이라고 느낄 때 더욱 강렬하지만, 그 운명성이란 역사적 서사와 맞물릴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등’은 ‘사랑의 원형질’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역사에 대한 의미있는 반추가 되는 것이죠.

ps. 작년에 TV문학관 '외등'을 보았다. 2005년 5월 경에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인데 우연찮게 작년에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지난 오늘 연출을 맡은 최지영PD의 후기를 보았다. 그것이 위의 내용이다.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단편 드라마다.

Pencils Pencils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