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바꾸라는 안내 전화를 받지 않는 방법

2013. 5. 8. 22:44

 

언제부턴가 하루에 1번꼴로 최신 휴대폰으로 바꾸라는 전화 또는 문자를 받는다. 한 동안은 좋게 ‘다음에 바꾸겠습니다.’라고 끊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대리점들은. 그러니까 전국 “각각의 대리점들”은 나에게 1번만 전화를 걸면 되지만 나는 나에게 전화를 거는 대리점 수만큼 저 말을 반복해야 되는 것이다.

 

전국 휴대폰 대리점 수가 얼마나 될까? 휴대폰 유통업체도 모를 정도로 많을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군데씩 생겼다 망했다 하는 게 휴대폰 대리점이니까 말이다.

 

 

어느 대리점에서 전화가 왔다. 교체를 원하면 1번을 누르라는 멘트가 나온다. 당당하게 1번을 누르고 안내원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고객님’이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따져 말했다. ‘전화하지 말라니까 왜 자꾸 전화합니까. 당신들 kt 대리점 수가 몇 개인지 아세요? 제가 그 대리점 수만큼 전화를 받아서 같은 말을 반복해야 전화 안하실 겁니까. 전화 안 바꿉니다. 다신 전화하지 마세요.’라고 끊어버렸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대리점에 열 낼 일이 아니었다. KT에 전화를 걸어서 따져야겠다는 생각에 KT로 다이얼을 돌렸다.

 

대리점으로부터 받는 위와 비슷한 상황이 짜증난다고 말을 하면 직원이 조치를 취해준다. 어떤 조치를? 대리점에서 고객을 조회하고 그 고객의 전화번호를 알고자 클릭을 했을 때 전화번호가 뜨기 전에 “이 고객은 휴대폰 교체 안내 전화를 거부한 상태입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먼저 뜨게끔 팝업창을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 날 이후로 KT대리점에서 걸려오는 전화는 없는 것 같다.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누구든 휴대폰 대리점을 열면 모든 고객의 정보(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각종 스펨문자의 온상은 휴대폰 대리점들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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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못말리는 언론. 장하진이 누구길래.

2011. 9. 5. 17:59

문득 네이버 검색순위 1위가 장하진이다. 물론 그 1위도 신빙성이 없는 1위겠지만 그것을 떠나서 "왜 하필 장하진일까? 건드려서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아니면 "누가 로비 좀 했나? 왜 뜬금없이 장하진일까?", "공부 좀 했으니 이제 연예계 데뷔하려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하진

더욱이 웃긴 건 장하진이 카이스트에 입학을 해서 화제가 됐던 것은 올 3월이란 말이다. 그 때의 기사 제목들이 아래와 같이 존재하는데 뜬금없이 똑같은 내용으로 화제는 뭔 화제란 말일까.
 

기획사 연습생에서 카이스트 학생으로 변신한 장하진 '눈길'천지일보 2010.03.22 (월) 오후 5:00
연예인 꿈 접고 카이스트 입학한 장하진 "눈길"이투데이 2010.03.22 (월) 오후 5:05
장하진, 연예인 포기하고 카이스트 입학 ‘관심 집중’굿데이스포츠 연예 2010.03.22 (월) 오후 5:24
'아이돌 지망생에서 KAIST 학생으로', 장하진 화제 헬스코리아뉴스 2010.03.22 (월) 오후 5:45

 

보도된 내용의 요점은 이렇다. 소시를 떠나고 카이스트에 입학한 장하진이라는 소녀의 공부비법을 공개하겠다는 것. 그리고 오는 6일 방송될 SBS `출발 모닝와이드` 4부 `최기환이 만난 그녀` 코너에 출연해 소녀시대 제 10의 멤버임을 포기하고 카이스트에 진학한 이야기를 밝힌다는 것이다.

장하진은 인터넷에 간단한 프로필도 등록된 것이 없다. 단지 경력이라면 SM연습생이었다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올 7월에 케이블 무슨 음악 방송에 출연했었다는 것.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언론에서 말하는 장하진은 공부보다도 외모에 치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얼굴 좀 반반하니 다시 한 번 연예계를 기웃거려도 괜찮다는 냥 말이다. 너는 공부도 공부지만 그보다 얼굴 좀 반반하니 연예계는 언제든 환영이라는 듯이 말이다.

어느 언론사에서 촉발된 가십인지는 모르겠으나 데뷔를 할 예정이면 그렇다고 하지, 뭔 때 지난 기사를 가지고 이리 호들갑이란 말인가. 무명에 가까운 아이를 꼭 이렇게까지 최소한 초딩, 중딩, 고딩들한테만이라도 각인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스타급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나처럼 캠브리지대학교 교수인 '장하준'으로 착각해 뉴스를 접한 이가 또 있을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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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밥은 먹고 있구나. 다행이다 생각해야 하는 건데.

2010. 12. 5. 21:10

어느 한 날, 날이 저물자 계절은 바뀌고. 나이는 드는 건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그 높고 푸른 만큼 걱정도 솟아있고. 고래고래 살다보면. 그래도 밥은 먹고 있구나. 다행이다 생각해야 하는 건데. 야근 한다 불평하는 놈한테 야근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한테 미안한 줄 알아라 하니 뭔 소린지 모르겠다 하고. 월급 적다 때려치운다 하는 놈한테 니 월급에 반을 준다해도 일하겠다는 사람 줄섰다 하니 미친놈이란 소리나 하고. 낙엽 좀 쓸어라 하니 며칠 있으면 또 쌓일 텐데 뭣 하러 치우냐 하기에 삼시세끼 밥은 뭣 하러 먹고 다니냐 하니 배고파서 먹는다 한다. 좀 있으면 또 배고플 텐데 뭣 하러 먹느냐 하니 미친놈이란 소리나 하고. 모기 많아서 못살겠다 하는 놈한테 목숨 걸고 먹고 살자고 덤비는 꼴이 너보다 낫다 하니 어깨에 앉아 애써 대롱 꽂을 위치 탐색 중인 모기를 손바닥으로 짓눌러 죽이곤 어디로 튕겨버린다. 고래고래 살다보면 그래도 밥은 먹고 있구나. 다행이다 생각해야 하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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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선정, "지난 10년간 기술적으로 실패한 10대 제품"

2010. 10. 26. 23:32

출처. LG경제연구소

3. HD DVD

2002년 차세대 DVD시장을 놓고 'HD DVD(High-Definition DVD)'와 '블루레이 디스크(Blu-ray Disk)'가 격돌한다. 'HD DVD'는 NEC와 도시바가 이끄는 0.6mm 두께의 디스크이고, '블루레이 디스크'는 소니와 마쓰시타가 이끄는 그보다 0.1mm 얇은 디스크이다. 당시 삼성과 LG는 '블루레이 디스크'쪽을 지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2004년 할리우드의 파라마운트, 유니버셜픽처스, 워너브라더스, 뉴라인시네마 등 4개 영화사가 'HD DVD'규격 지지를 선언(DVD시장 점유율 45%)하면서 'HD DVD'가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지만 그 해 말 디즈니, 소니픽처스, MGM, 20세기 폭스사가 소니의 '블루레이 디스크'를 지원(DVD시장 점유율 47%)하면서 점유율 면에서 근소한 차이로 'HD DVD'를 앞섰다. 또한 2005년 워너브라더스가 '블루레이 디스크'를 지원하기로 마음을 바꾸면서 시장의 판세는 '블루레이 디스크'쪽으로 기울어졌다. 표준 규격을 놓고 경쟁을 벌인지 6년만인 2008년 2월에 도시바가 소니에 무릎을 꿇었다.

8. Palm

1992년 설립된 팜은 PDA와 같은 소형 정보기술(IT)기기시장의 개척자로 통한다.

지난 3월 18일 발표한 2010 회계연도 3분기(2009.12~2010.2) 실적 보고에서, 11분기 연속 적자라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내놓았다. ‘iPhone 킬러’로 기대를 모았던 Palm Pre의 판매량이 겨우 iPhone의 5%에 불과한 40만 8,000대에 머무르는 등, 출시 단말의 잇단 성적 부진을 면치 못했다. 저가형 스마트폰이라는 개념으로 올 1월에 출시한 Pixi Plus의 경우도 청소년층을 비롯한 젊은층에 어필하지 못했고, Pre와 Pixi의 iTunes 연동 문제도 계속해서 Apple의 맞대응으로 원활하지 못했던 것도 문제점으로 남아 있었다.

Palm은 올 4월 28일 미국 HP(휴렛팩커드)사에 매각되었다

Palm의 매각설은 이미 예전부터 빈번하게 증시에 오른 재료였다. webOS에 대한 기대치는 높았지만, 실제 단말기 시장에서 소비자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점과 iPhone OS, BlackBerry OS, Android의 3파전이 벌어지는 미국시장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도 못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10. Segway

1인용 운송수단인 세그웨이는 도시의 출퇴근 광경을 바꿀 가장 혁신적인 제품의 하나로 전문가들에 의해 예찬되었다. 또한 애플의 스티브 잡스(Steve Jobs), 아마존의 제프 조스(Jeff Bezos) 같은 혜안을 가진 사람들의 투자를 이끌어낼 정도로 이 제품은 출시 전 큰 기대를 모았다.

세그웨이는 기술적으로 매우 뛰어났다. 스스로 균형을 잡는 지능적인 메커니즘을 이용해 탑승자가 넘어지지 않도록 하였으며 몸을 앞뒤로 기울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나아가거나 방향전환이 되고 정지할 수 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완벽한 수준을 보여준 이 제품은 출시 전 기대와는 달리 18개월 동안의 판매 실적이 6,000여대에 그치면서 저조한 성과를 보였다.

세그웨이의 실패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용자의 입장을 한번 더 깊이 고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까운 거리를 이동할 때 주로 이용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인도에서는 너무 빠르고 차도에서는 너무 느린 속도로 인해 이용하기가 편하지 않았다. 도심 출퇴근 광경을 바꿀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멋진 정장을 차려 입고 세그웨이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또한 1,000만원이 넘는 가격대와 1회 충전으로 최대 39km까지만 주행할 수 있는 활용성의 제한 등은 고객들이 제품 구입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다. 결국, 세그웨이는 기술적으로는 매우 뛰어난 제품이였으나 그것이 사용자와는 동떨어진 ‘나 홀로’ 혁신이 되었던 것이다. 새롭기는 하였으나 고객에게 이 제품을 사용해야 할 가치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 기술적으로만 훌륭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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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2000년대를 앞서가는 컴퓨터를 아십니까?

2010. 10. 25. 19:36

2000년대를 앞서가는 컴퓨터

인간두뇌의 승리 - 참피온 컴퓨터 86 XT
CPM과 APPLE BASIC을 동시에 사용하여 1대가 2대의 컴퓨터 역할을 하는 참피온 컴퓨터 86XT 탄생은 인간두뇌의 승리이며 APPLE 컴퓨터의 정상입니다. 오직 개인용 컴퓨터만을 연구 개발해 온 (주)참피온 컴퓨터 기술팀의 개가입니다. 성능에서의 "참피온" -쉬지 않고 연구하는 참피온- 여러분에게 2000년대를 앞서가는 "컴퓨터의 참피온"을 드리겠읍니다.

3배의 대용량, 초고속처리, 참피온 AD1000 보조기억장치
참피온 컴퓨터의 보조기억장치 AD1000은 용량부족으로 인해 업무 처리에 불편을 겪어오던 개인용 컴퓨터의 148KB 한계를 훨씬 넘어선 1메가바이트(1MB)로 무려 3배의 대용량, 초고속처리가 되는 획기적인 프로피드스크드라이버입니다.

* 지금의 표준어가 아닌 그 당시 표준어 기준으로 작성되었음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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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씨소프트 윤송이의 반란

2010. 8. 26. 23:05

엔씨소프트 부회장 '윤송이'씨.

그는 천재소녀로 불렸다. 서울과학고를 2년 만에 졸업했고, KAIST를 수석으로 나왔다. 짧게는 6년, 길게는 8년 걸린다는 MIT 미디어랩을 3년6개월 만에 끝냈다.

그의 나이 24세, 최연소 여성 박사였다. 28세가 되던 2004년 3월엔 SK텔레콤 임원에 올랐다. 이 역시 최연소 기록. 단기속성의 달인 같다. 국내에서만 각광 받았던 건 아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를 ‘주목할 만한 세계 50대 여성 기업인(2004)’으로 꼽았다. 2006년엔 WEF(세계경제포럼)의 차세대 지도자로 선정됐다. 이 대단한 이력의 주인공은? 윤송이(35) 엔씨소프트 부사장이다.

그는 화양연화(花樣年華·꽃처럼 아름다운 때)를 스포트라이트와 함께 보냈다. 스스로 원했든 그렇지 않든 세상은 그를 양지로 끌어냈다. 정치권도 ‘금배지’를 달아주겠다며 연일 손짓했다. 그의 앞길엔 장애물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보다 냉정한 법. 한번 띄웠다 싶으면 보란 듯이 내친다. 윤 부사장도 그걸 피하지 못했던 것 같다. SK텔레콤 시절 그가 추진한 프로젝트(1㎜)가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세상은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천재소녀의 명성에 흠집만 낸 프로젝트’라는 평가도 나왔다. 그리 원하지도 않았는데 붙여진 별명이 되레 부메랑처럼 그의 가슴을 쳤을지 모른다.

2007년 말, 그는 SK텔레콤에 사표를 던졌다. 32번째 생일을 꼭 일주일 앞둔 때였다. 스포트라이트는 꺼졌고, ‘왜 떠날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납득하기 힘든 소문도 돌았다. 그는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언론과의 접촉도 끊겼다. 그에 대한 소식이 전해진 건 사표를 낸 지 1년 여가 흐른 2008년 11월. 남편(김택진)이 이끄는 엔씨소프트 부사장에 취임한 직후였다. 물론 취임 소식이 전부였다. 어떤 역할을 하는지, 어떤 프로젝트를 추진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엔씨소프트도 ‘윤 부사장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선 취재를 허용하지 않았다. 방침이 그렇다고 했다.

올 7월 둘째 아들 출산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2년여. 천재소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윤 부사장을 8월 9일 롯데호텔월드강남에서 만났다. 갈색 원피스에 굽이 높지 않은 구두. 생머리에 웃는 인상. 머리를 조금 길렀을 뿐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겉보기에 달라진 점은 딱 하나. 치아 교정기를 낀 것뿐이다. “교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 같은데”라고 묻자 “필요했어요”라며 살포시 웃는다.

윤 부사장을 이제 천재소녀라고 부르기엔 어색하다.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 두 아들의 엄마다. 첫째는 언론에 알려졌듯 2008년생이다. 둘째는 올 7월 태어났다. 윤 부사장을 만난 건 그의 출산휴가 때였다. 첫째는 자연분만했는데 둘째는 수술을 했다고 한다. 유독 심한 산고 끝에 둘째를 봐서일까. 그는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렵게 세상에 나오고 길러졌는지 새삼 절감해요. 사람이 소중하다는 걸 더 느끼게 됐어요.” 두 아이 중 누가 예쁘냐고 물었다. “두 아이 모두 똑같이 예뻐요.” 한때 천재소녀로 불렸던 그는 어떤 대답을 할까 궁금했는데, 대한민국 엄마는 다 똑같은 모양이다.

윤 부사장의 이미지는 별명을 분리하면 금세 나온다. 천재 그리고 소녀다. 그를 소개한 글을 읽어보면 늘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화려한 이력을 가진 천재지만 ‘하하 호호’하면서 웃는 영락없는 소녀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표현인 것 같다. 별명과 그의 모습은 천양지차다. 윤 부사장은 단 한 번도 소녀 같은 웃음을 짓지 않았다. 질문이 이해되지 않으면 입을 쉬이 열지 않았다. 인터뷰 후 주고받은 e-메일에서도 그랬다. 스스로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엔 답을 하지 않거나 주석을 달았다. 이런 식으로.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답을 하기 어렵고 모호하지만…” “지향점이 어떤 모습을 의미하는지 정확하지 않아서 모호한 듯합니다만…” 치밀한 그의 성격이 읽히는 대목이다.

엔씨소프트 취임 전후 실적

“현장에서 발로 뛰고 싶었다”
다음은 천재 이미지. KAIST를 다니면서도 동아리 4곳에서 활동하고, 그림·운동(테니스)·음악에 능숙. 이게 윤 부사장의 이미지다. 그야말로 천재적이다. 정작 윤 부사장은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재소녀란 별명에 대해서도 “내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공부든 운동이든 즐기면서 했다고 말했다. 특별한 걸 배우고 싶어서 KAIST 1학년 때 2학년 전공과목을 들었고, 예술활동을 열심히 할 요량으로 관련 동아리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는 이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고등학생, 대학생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스스론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고 있다는 뉘앙스의 말이다.

이런 생각은 요즘도 변함없는 듯하다. 윤 부사장이 출산한 걸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엔씨소프트 내부 관계자도 “임신 중인 줄 알았는데”라고 했다. 그가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출산하기 바로 전날에도 그는 회사 자료를 훑어보고 e-메일로 회신했다. 출산을 앞둔 임산부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니 출산 사실을 모를 수밖에…. 주변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윤 부사장은 어떤 상황이든 최선을 다한다. 천재형이라기보단 노력파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MIT 미디어랩의 박사학위를 땄을 무렵,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특히 연구를 함께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다. 대학교수도 떼어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새 길을 가고 싶었다. “학교에 있다 보니까 시야가 한군데로 고정되는 것 같았어요. 많은 가설을 현장에서 풀어보고 싶었죠. MIT에서 배운 걸 기업에서 적용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어요.”

그는 2002년 글로벌 컨설팅기관 맥킨지에 들어갔다. 조직생활의 원리와 1차 산업을 배웠다. 2002년 10월 최태원 회장이 출자한 SK그룹의 자회사 와이더댄닷컴 이사에 발탁됐고, 2년 후 SK텔레콤 상무에 올랐다. CI(Communication Intelligence)-TF를 총괄하면서 50여 명을 이끌었다. 그의 야심작 1㎜도 2005년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1㎜는 휴대전화를 음성통화·데이터통신의 도구에서 벗어나 ‘손안의 친구’ ‘손안의 비서’로 발전시키겠다며 선보인 신개념 서비스. 가령 사용자가 휴대전화에 날씨라고 입력하면 가상 캐릭터가 스스로 무선 인터넷에 접속해 날씨를 알려준다. 사용자가 일일이 접속할 필요가 없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 같다. 윤 부사장도 “맞다”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 앞선 기술이었던 걸까. 성적이 기대치를 밑돌았다. 2년 동안 가입자를 22만 명 모으는 데 그쳤다. 한 달에 1만 명도 가입하지 않은 셈. 1㎜에 대해 윤 부사장은 어떻게 생각할까.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건 인정해요. 그렇다고 실패로 보진 않아요. 의미 있게 도전했는데 넘어야 할 허들이 많았어요.”

그가 말하는 허들은 이것이다. 1㎜를 서비스하려면 이 프로그램이 깔린 하드웨어가 필요했다. 그런데 SK텔레콤은 망(網)사업자. 하드웨어를 만들지 못했다. 1㎜의 실패 요인으로 단말기 부족이 꼽힌 이유다. 윤 부사장이 1㎜의 실패를 만회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자 일부 여성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윤송이는 연구소에 있었어야 했다.” 새 길을 찾아 나선 그의 자존심을 짓밟는 이야기. 그도 “신문을 통해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후회하지 않는다. “SK텔레콤이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고 생각한다.

SK텔레콤도 윤 부사장을 영입한 후 많이 변했다. 한 관계자는 “SK텔레콤의 전략을 음성통신에서 무선데이터로 전환하는 데 (윤 부사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그의 도전은 엔씨소프트에서 계속된다. 김택진 대표와 결혼한 후 부사장에 취임했지만 그가 엔씨소프트와 인연을 맺은 건 2004년이다. 김 대표가 먼저 ‘사외이사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윤 부사장은 왜 이 제안을 선뜻 수용했을까. “엔씨소프트의 해외 지사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창구가 아니었어요. 현지인을 채용하고, 각 나라의 문화에 맞는 제품을 공급했죠. 국내 기업 중 (규모를 막론하고) 가장 글로벌화돼 있다고 생각했어요.”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다. 엔씨소프트의 글로벌 비즈니스는 유명하다. 2000년 해외 진출에 뛰어든 후 미국과 유럽에 지사를, 일본·중국·대만·태국에 합작법인을 설립했다. 제품 판매 창구가 아닌 현지화가 이들의 목적이다. 그 결과 엔씨소프트의 국내외 매출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은 36%에 달한다.

윤 부사장의 공식직책은 CSO(최고전략책임자). 회사의 미래 밑그림을 그린다. 김 대표는 윤 부사장이 취임한 후 R&D(연구개발)에 집중한다. 부부 공동경영이 아니라 분리경영에 가깝다. 김 대표의 어깨가 한결 가벼워졌을 것 같다. 그는 전형적인 엔지니어 출신 CEO. 서울대 전자공학과 재학 중 동아리 ‘컴퓨터 연구회’에서 이찬진 드림위즈 사장 등과 함께 ‘아래아 한글’을 공동 개발했다. 한글타자 연습 프로그램 ‘한메타자’와 ‘베네치아’ 게임도 그의 작품.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김 대표가 그간 고군분투했는데 윤 부사장이 전략을 맡으면서 한결 편해진 모습”이라고 말했다.

윤 부사장이 출산 전 역점을 두고 진행한 것은 게임 포털 ‘플레이엔씨’의 정착이었다. 플레이엔씨는 게임 유저가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내에 이런 유형의 게임포털은 없다. 윤 부사장이 신경을 바짝 쓴 것으로 알려진 게임지식백과사전 ‘파워북’도 유저의 호평을 받는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플레이엔씨, 파워북 모두 김 대표가 오랫동안 준비했던 프로젝트”라면서도 “하지만 윤 부사장의 아이디어와 경험 그리고 추진력이 녹아들면서 정착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윤 부사장 취임 후 달라진 건 또 있다. 엔씨소프트의 매출 감소세가 보란 듯이 멎었다. 엔씨소프트는 2006~2007년 간판 게임 브랜드 리니지가 흔들리면서 위기를 맞았다. 신규사업도 부진했다. 6년간 800억원을 들여 제작한 ‘리처드 게리엇의 타뷸라라사’ 게임도 흥행에 참패했다. 2005년 3388억원이었던 매출은 2007년 3297억원으로 줄었다.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766억원에서 495억원으로 감소했다. 회사 안팎에선 ‘게임업계 1위 자리를 뺏길 것’ ‘리처드 게리엇 형제가 먹튀 행각을 벌였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윤 부사장이 전략을 짜기 시작한 2008년 11월 이후 엔씨소프트는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그가 취임했을 때 선보인 롤 플레잉 게임 ‘아이온’은 그야말로 대박을 냈다. 2009년 12월 110만 장을 돌파했고, 북미 최대 게임축제(PAX)에서 최고 MMO게임상을 받았다. 이를 발판으로 매출은 2008년 3468억원에서 2009년 6347억원으로 83% 늘었고, 영업이익·당기순이익은 각각 4.8배(2008년 501억원→2009년 2340억원)와 7.4배(2008년 256억→2009년 1883억)가 됐다.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윤 부사장이 내실을 탄탄하게 만든 게 실적 개선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많다”며 “김 대표도 ‘복덩어리가 들어왔다’는 말을 종종 한다”고 말했다.

출산휴가 중인 윤 부사장은 지금 엔씨소프트의 새 청사진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론이 재미있다. 이른바 ‘엄마노믹스’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 후 윤 부사장은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해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가족이 행복하고 가정이 안정돼야 회사에 지속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런 환경을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신경을 쓰겠다는 다짐도 했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윤송이의 ‘엄마노믹스’. 엔씨소프트의 성장 젖줄이 될지 모른다.

이윤찬 기자 chan487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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