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등(outdoor lamp)'
1. 왜 ‘외등’인가?
KBS가 10년간 추진하는 HD TV문학관 100선 가운데 8편이 2005년에 방송됩니다. 그 가운데 이미 ‘외등’을 포함 4편이 5월 중에 방송되었구요. 이제 4편이 남았습니다. 저는 하반기에 방송할 또 한편을 제작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실 100선을 시작하는 지점에서 왜 박범신 선생님의 ‘외등’을 선택했느냐 질문이 주위에서 많았습니다. ‘소나기’, ‘역마’와 같은 근대 순수 문예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2000년대 현대문학도 아닌, 어찌 보면 ‘80년대식’의 ‘낡아 보이는’ 대중소설을 왜 문학관으로 하느냐는 의문이 들었나 봅니다.
저는 대학을 85년에 들어갔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80년대 초반에 보냈습니다. 그 때는 감수성이 무척 예민하던 시기라 소설 한편에도 눈물을 떨궈가며 탐독했는데, 당시 중고생 모두들이 그랬듯이 처음에는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토스토옙스키의 ‘죄와벌’, 지드의 ‘좁은 문‘ 따위의 외국 ’연예류‘ 소설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참고서를 사러 들른 헌책방에서 우연찮게 한국 소설책을 한 권 접했는데, 그 소설이 바로 박범신 선생님 작품이었습니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코끝이 찡했던 장면은 애인이 숨을 거두고 넣어진 관 위로 남자 주인공이 준비했던 하얀 웨딩드레스를 얹어주던 부분이었던 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래서 꼭 박범신 선생님의 작품을 ‘드라마’로 만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에, 2005년 ‘HD TV문학관’ 연출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박 선생님의 작품의 거진 반은 이미 드라마로 만들어졌던 터라, 제가 새로 읽고 만들 작품을 남겨놓지 않으셨더군요. (지금 KBS 주말 드라마를 연출하시는 정을영PD 선배가 도맡다시피 했습니다.)
‘외등’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소설입니다.
첫 장면은 서영우의 동생 -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복이 아니라, 재취하여 들어온 여인의 소생- 서재희에게 오빠의 시신을 확인해달라는 경찰의 전화입니다. 서영우는 민혜주가 입원했던 병원의 근처 삼나무 아래서 동사한 채 발견된 거죠.
바로 이 장면이 제 시선을 담박에 붙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며 일생을 마감 짓는 남자, 서영우.
물론 원작에서는 민혜주가 이미 떠난 빈 병실을 바라보며 죽습니다만, 아무래도 죽어가는 서영우의 눈에는 분명이 허상이나마 민혜주가 보였을 거란 상상을 나름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꺼져가는 플래쉬의 필라멘트, 눈에 덮혀가는 영우의 어깨, 이런 이미지들이 가슴속을 덮쳐왔습니다.
‘글쎄요, 누군가 자신을 보기 바랐던게 아닐까요?’ (소설 P15)
이 강렬한 한 장면이 바로 소설 ‘외등’이 보여주고자 했던 ‘사랑의 원형질’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드라마 ‘외등’이 극적으로 화면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장면만 확실히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그래서 감동을 일으킬 수 있다면, 소설의 창의적인 변주가 가능할 것이다‘란 믿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작 소설은 356페이지에 이르는 장대한 양인데다가 주인공들이 10대에서 50대에 걸치는 기나긴 세월의 사랑이야기인 탓에, 이를 100분 분량의 단편 드라마에 담기 위해서는 극적 변주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민혜주는 일제 태평양 전쟁에 위안부로 강제로 끌려갔던, 역사의 아픔을 지닌 어머니를 둡니다. ‘정글에서 왜군들의 정액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던’ , 그래서 매독이란 성병과 더불어 남자에 대한 광적인 혐오 등 정신적 상처가 깊이 패인 가련한 여인입니다. 물론 소설 속의 민혜주는 일본인의 피를 받지 않았습니다. 민씨라는 뜨내기 사내의 소생이라고만 표현됩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차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서산댁이 일본 사창가를 떠돌다가 민혜주를 얻는 것으로 설정됩니다. (방송 분에서는 이 장면과 관련한 부분이 편집되었습니다, 혜주와 서산댁이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 서산댁과 혜주의 대화 장면 등...DVD 본에서는 생략된 15분 가량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민혜주는 한국과 일본의 경계인이며, 불행한 역사의 현화입니다.
일군 위안부란 과거는 불행하고도 굴욕적인 우리의 현대사입니다. 가해자인 일본에서는 부인하고 잘못을 인정치 않고 있지만, 양측의 어떤 입장을 떠나서 그저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더라도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분명한 아픔의 역사입니다.
몇 해 전 일본인 탈렌트 유민(후에키 유코)씨가 일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찾아뵙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가 일본에 나가자, 일본의 우익 단체들이 ‘네가 왜 눈물을 흘리느냐’ 며 유민씨를 공격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저는 혹시 일본인들이 보더라도 그네들 역시 ‘가슴 아프고 반성을 하도록’ 호소하고 설득하고 싶었습니다.
다른 한편에는 서영우가 있습니다. 70, 80년대 좌우익의 이념이 서로 서린 칼날 맞대던 시절에 아버지를 잃고 그 낙인을 등에 지고 사는 남자입니다. 원작에서는 아버지의 관성 탓인지 노동운동가로 성장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드라마에서는 그 낙인에 대한 서영우의 반작용을 다른 각도에서 현실화하고자 했습니다.
‘지울 수 없다면 덧칠이라도 해야겠다는’ 영우의 몸부림과 혜주의 현실도피의 욕망을 맞닿게 하고 싶었고, 어느 누구도 이 둘을 비난할 수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씬 86 바닷가 어느곳
혜주 영우 넌 어디쯤, 그리고 난 어디쯤 그 낙인이 찍혀 있을까?
영우 그건 우리 눈엔 안 보이는데 있어, 남들에겐 보이지만.
이 낙인이라는 공통점이 이 두 남녀를 묶는 운명적 고리이며, 다른 편에서는 두 남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덫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노상규는 왜곡된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아이콘입니다.
일제 때부터 친일로 기득권을 누리면서 부를 축적한 매판자본의 상징입니다.
‘노상규의 조부가 총독부의 고급 관리로서 일제의 야만적 전쟁수행을 위해 징병을 독려하고 군량을 모을 때, 서산댁은 열 몇살의 나이로 말라리아 들끓는 정글의 움막에서 포악스런 왜군의 정액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아버지가 빨갱이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을 때 노상규의 부친은 파죽지세 재산을 늘렸으며...(소설 P350)
이렇듯 비틀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각 꼭지점 위에 서영우, 민혜주, 노상규가 서 있었던 것이며, 적어도 결국 외적으로는 서영우와 민혜주의 사랑이 노상규에게 투항하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을 맺습니다. 이것이 현실의 비극입니다.
외등은 ‘단순한 사랑 놀음’의 이야기에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은 운명적이라고 느낄 때 더욱 강렬하지만, 그 운명성이란 역사적 서사와 맞물릴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외등’은 ‘사랑의 원형질’에 대한 탐구이며, 동시에 역사에 대한 의미있는 반추가 되는 것이죠.
ps. 작년에 TV문학관 '외등'을 보았다. 2005년 5월 경에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인데 우연찮게 작년에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지난 오늘 연출을 맡은 최지영PD의 후기를 보았다. 그것이 위의 내용이다.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진 단편 드라마다.